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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태양

하나님을 무엇보다 사랑하는 일에 대해

[2.102.1] 그러나 율법을 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철저히 체험하고, 이해하려면, 율법 자체가 실제 하나님의 사랑에 도달하는 건조한 길에 불과함을 알아야만 합니다.

[2.102.2] 자신의 심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은 이미 이 길을 다 갔습니다. 그러나 단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이러한 사랑으로 아직 항상 길을 가는 여행자이고, ​​열매가 자라지 못하고, 강도와 도둑이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는 일이 희귀한 일이 아닙니다.

[2.102.3] 그러나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모든 법을 넘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길을 가는 중에 있는 사람은 가장 힘든 방법으로 미리 설정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걷기를 계속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길을 뛰어 넘어, 다시 말해 법 전체를 뛰어 넘어,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2.102.4]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 개념으로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말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한다는 의미인데,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리네요.“ 좋아요, 그러나 내가 말하면서, 동시에 묻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사랑을 측정하는 표준은 무엇입니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최대한 가능한 가장 큰 사랑에 대한 표준을 명확하게 충분히 생각했고, 사람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무엇보다 사랑하는 일에 대한 표준이 전혀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102.5] 그러나 나는 말합니다. 주어진 법이 사람 자신이 세상 것들에 대한 욕망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다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이 법에 나타나 있고, 게다가 모든 사람이 세상 것에 대해 처신해야 하는, 사람의 사랑에 대한 정당한 제한이 있습니다.

[2.102.6] 그러나 누군가가 법을 넘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는 또한 분명히 모든 세상 것을 넘어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했듯이, 법을 통해 세상 것들의 사용과 세상 것들에 대한 처신을 하나님의 질서에 따라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교할 수 있는 짧은 예화가 이 논점을 태양처럼 선명하게 해줄 것입니다.

[2.102.7]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다른 말로, „만약 젊은 당신이 법을 관찰했다면, 그 법을 넘어, 모든 세상의 법들과 세상의 모든 것들을 세상에 돌려주고, 너는 나에게 머물라. 그러면 당신은 생명을 얻는다!“ 라는 의미입니다.

[2.102.8] 누가 여기에서 법을 넘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2.102.9] 주님은 계속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다름이 아니라.

[2.102.10] 만약에 너희가 어린 아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에, 법과 세상의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나에게 나와, 모든 사랑으로 나를 붙잡지 않으면,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왜 들어가지 못할까요? 왜냐하면 주님 자신이 다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러므로 아버지와 온전하게 하나인 나에게 오기 원하는 사람은 나를 통해 외양간 안으로, 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2.102.11] 그러므로 주님 자신을 붙잡지 않는 사람은, 주님을 붙잡지 않는 동안 비록 그가 바위처럼 천개의 법을 변함없이 관찰할지라도, 주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은 아직 주님과 함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곁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길을 가는 일이 필요합니까?

[2.102.12]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주님보다 길을 훨씬 더 높게 여기는 수십만 명의 바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미 주님과 함께 하면, 그들은 단지 비참한 길에 서기 위해 다시 주님을 떠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주님보다 종의 처신으로, 노예로 사는 일로, 무거운 멍에로 돌아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해방시키는 주님보다 종, 노예 제도, 멍에에 더 기쁨을 누립니다. 인생의 과정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의 목을 누르지 않게 하기 위해, 유일한 사랑의 법인 짐이 아주 가볍게 하기 위해, 주님의 멍에는 매우 가볍고, 부드럽습니다. 우리 계속하여 다음 예를 봅시다.

[2.102.13] 의로운 바리새인은 길을 가는 가운데 자신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모든 길을 매우 어렵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목표를 바라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심장으로 주님 앞에 깊게 허리를 굽히고, 자신의 연약함과 길을 정확하게 갈 능력이 없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대신에 그는 심장을 다해 주 하나님을 붙잡고, 이로써 힘든 모든 길을 크게 뛰어 넘어 목표에 도달합니다!

[2.102.14] 누가 여기에서 "주님을 무엇보다 사랑하라"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까요? 계속하겠습니다. 마르타는 길을 가는 중이고, 마리아는 목표에 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을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2.102.15] 그러나 우리가 이를 추가로 더 명확하게 하기 원하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님을 사랑하는지 세 번이나 묻는 장면을 관찰합시다. 왜 그에게 세번 묻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미 베드로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고, 또한 베드로가 세 가지 동일한 질문에 대해 같은 마음과 같은 입으로 대답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주님은 이를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이 알고 계신 것때문에 주님이 베드로에게 질문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자신이 자유롭고, 주님을 모든 법을 넘어 사랑한다고 고백해야 하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질문 "베드로야, 나를 사랑하느냐?"는 „베드로야, 가는 길에서 나를 찾았느냐? “를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이 질문에 „예“ 하고 답했습니다.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형제들이 또한 나를 찾도록 도우라.“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 질문: "베드로야, 나를 사랑하느냐?"의 의미는 „베드로야, 너는 내 곁에 있고, 문 앞에 있느냐? “입니다. 베드로는 이 질문에 „예“하고 답했습니다. 주님은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 또는 „그러면 형제들이 나의 곁에 있고, 생명의 문 앞에 있도록, 그들을 인도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베드로야, 너는 모든 법을 넘어섰느냐? 너는 내가 너 안에 있는 것처럼 내 안에 있느냐? “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염려하며 „예“하고 답했습니다. 주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내 양을 먹이고, 나를 따르라!”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면 너도 또한 형제들을 인도하여, 형제들이 내 안에 거하고, 너처럼 나의 질서와 사랑 안에 거하게 하라. “

[2.102.16]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는 일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무엇보다 사랑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더 말하는 일이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제 이를 알고 빛 중의 빛을 깨달았음으로, 마지막 방으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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